올해 4월 국립무용단을 대표하는 <향연>을 관람하고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습니다. 눈을 사로잡는 현란하고 기교로 가득 찬 몸짓도 좋지만, 물 흐르듯 잔잔하고 유려한 춤에서 오는 여유로움은 관객인 나조차 그 여백 속으로 녹아들 듯 편해지는 느낌이 무엇보다 좋았어요.

 

<향연>에서는 다양한 우리 춤으로 구성되어 그 맛을 일부분 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묵향>은 여백의 미로 점철된 프로그램으로 흠뻑 젖은 시간이었습니다. <향연>이 다채로운 맛을 볼 수 있는 잔칫상이었다면, <묵향>은 여러 대를 거쳐온 진한 국물을 우려낸 사골국같았어요.

 

사계절을 상징하는 ', , , '이라는 사군자를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서무와 종무까지 총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공연시간은 60분으로 짧은 편이었습니다. 인터미션은 없으니 볼 일은 꼭 해결하고 관람하시길.

 

 

 

 

 

 

제례를 의 올리듯 경건하게 시작하는 서무는 순백의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남성들의 중후한 멋스러움을 볼 수 있습니다. 선비의 모습으로 글 공부하다가 운치로운 달밤에 홀로 춤추는 모습은 어떨지 상상하게 되었어요. 새벽녘의 여명을 밝히듯 기운을 깨우는 춤으로 공연은 시작됐습니다.

 

곧이어 붉은 매화의 꽃잎을 달아 입은 듯 자색 저고리와 은은한 하얀색(?) 파스텔톤의 치마를 입은 무용수의 아름다운 모습은 순백의 도화지에 찍힌 검은 점처럼 강렬했어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복보다는 좀 짧은 저고리와 긴치마는 현대적 느낌을 더해 세련됨을 더했습니다.

 

치마 디자인이 독특한데 펑퍼짐했어요. 아름답고 우아하게 부풀려있어 부자연스럽지 않으며, 그 속의 몸짓을 상상케 하는 효과를 주었습니다. 다른 부분들도 개선이 많이 되었던지 어깨부터 팔과 손으로 이어지는 선이 명확하게 보여 그 우아함을 보는데 어려움이 없었죠. 살짝 치마를 들어올리며 발짓을 보여줄 땐 절제된 에로티즘의 미학까지 느껴졌습니다.

 

 

 

[제2장. 매화]

 

 

 

 

정중동의 모습만으로 시종일관하지는 않았어요. 플라멩코의 화려함은 저리가라 할 만큼의 손짓에 넋을 잃을만하면 다시 절제된 흐름으로 돌아갔습니다. 전체 구성 중 가장 싱그러워 보였던 '난초'의 무대는 흥겨움을 많이 표현했어요. 무용수(이요음씨)의 화사한 웃음으로 시작하는 우리 춤은 무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묵향의 포스터에는 여백이 돋보였어요. 노란 치마에 검은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몸짓 한 순간을 담은 사진과 '묵향' 타이틀 사이에는 많은 공간이 비어있습니다. 그 여인이 나오는 장이 바로 '국화'입니다. 슬픈 기운이 갈무리된 춤 같아 보였어요. 한을 가슴에 쌓고 극히 일부분만 표현했습니다.

 

해금의 울리는 현이 슬픔을 더했을 수도 있어요. 추위를 감내하며 결실을 이루어내는 모습이 이럴까요? 줄 듯 주지 않고, 닫을 듯 닫지 않는 묘한 느낌을 주는 춤이지만 몰입됩니다. 무용수들이 걸어가듯 달려가는 동작은 일품입니다. 경박스럽지 않게 뛰어가는 모습 자체가 춤으로 다가오는데 상체의 몸짓까지 더해지니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가 묻어 나왔어요.

 

 

 

[제3장. 난초]

 

 

 

겨울의 맹추위 속에도 꼿꼿한 대나무의 기상을 보여주는 '오죽'의 장은 시원합니다. 긴 장대를 짚고 하늘을 가르는 모습은 힘찬 아름다움을 상징하죠. 곧지만 유연한 대나무의 특징을 춤으로도 잘 표현한 듯 기개가 넘치면서도 부드러운 몸짓을 보여주는 남성 무용수들입니다. 간혹 무협영화에서 봤을 듯한 무용 동작은 친근함을 더하는 걸 보면 과하지 않게 녹아있지요.

 

대금의 리드미컬한 연주에 무용수들이 바닥을 대나무로 내려치는 소리는 흥을 돋우어주었습니다. 병풍 같은 무대의 스크린에는 선비들이 썼을 붓글씨가 보여지며 이들의 성품을 암시하는 듯 했어요. 뿌리를 튼튼히 내려 곱게 뻗었지만 바람에도 마음을 내어주듯 흔들리는 유연함을 지닌 대나무의 성질을 보여 줍니다.

 

전체를 마무리하는 '종무'는 서무와 대비되어 남녀무용수가 검은 계열 한복을 차려입고 나왔어요. 먼저 여성 무용수들의 흥겹지만 과하지 않은 몸짓들이 가야금과 바이올린의 조화로운 선율 속에서 흐트러집니다. 전체 작품 중 가장 군무스러운 동작들이 함께했어요. 짝을 이루어 등을 맞대고 함께 회전하는 동작은 멋스러웠습니다.

 

 

 

[제4장. 국화]

 

 

 

한 명의 남성 무용수가 등장해 독무를 펼치죠. 그의 춤을 보면 마치 호수에 떨어진 잎새가 바람에 맞추어 흔들리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양 옆에 도열해있던 여성 무용수가 다시 무대를 차지했다가 또 다시 남성무용수들의 춤이 꾸며졌어요. 이내 함께하는 여성 무용수들의 춤을 보며 '조화'의 테마에 걸 맞는 안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남성과 여성 무용수의 춤은 닮지 않았으며 본연의 색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가야금과 바이올린 역시 자신들의 음색으로 조화를 이끕니다. 그러고 보면 계절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에는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해서 아쉽지만, 우리나라의 뚜렷한 사계절은 조화를 이루어 세월을 나타내주죠.

 

 

 

[제5장. 오죽]

 

2016년 10월 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람

안무: 윤성주, 연출: 정구호, 국립무용단

 

 

 

by 왕마담 2016.10.26 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