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케 아르도라 공연 중의 주요 장면, 출처: 구글이미지 검색]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오래간만에 플라멩코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무용 작품은 뮤지컬이나 음악회, 연극 등에 비해 무대에서 만날 기회가 적은 듯 해요. 그나마 발레나 현대무용 외의 춤을 보는 건 더욱 어려워 아쉽습니다. 올해로 15년째 열리고 있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그 목마름에 단물을 줄 수 있었죠.

 

<댄싱9>에 출연하여 현대무용의 매력을 보여준 김설진씨가 속해 있는 벨기에 무용단 '피핑 톤',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님이 극찬한 '로버트 윌슨'이 연출가로 있는 '베를린 앙상블', 전석 매진이라 아쉽게 보지 못했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한 임형택씨가 소속된 '서울공장' 등 국내외 유명 극단과 무용단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그 중 가장 땡기던 공연은 플라멩코 새로운 스타로 불리는 '로시오 몰리나(Rocio Molina)' <보스케 아르도라(Bosque Ardora): 사랑의 숲> 였습니다. 80년대생의 플라멩코 공연을 본 건 처음입니다. 이전에 감명 깊게 봤던 '사라 바라스' 역시 젊은 편에 속했는데 나이가 이미 40대 중반이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봤던 공연에서도 역시나 나이 많은 집시의 무대였습니다. 스페인 플라멩코 국립 발레단 공연에서의 독무대를 보여준 마에스트로들도 나이가 많아 보였어요. 경륜에 비례하여 울림이 깊어지는 춤과 음악이기 때문인 듯 합니다.

 

 

[로시오 몰리나의 화려하고 묵직한 사파떼아또의 Bulerias]

 

 

 

보스케 아르도라: 사랑의 숲

 

1984년 생인 로시오 몰리나의 공연을 보고는 기존 패턴과 전혀 다른 춤과 음악 덕분에 인식까지 달라졌어요. 현대적인 느낌이 가미된 안무와 함께 특유의 리듬감과 음악 그리고 경쾌함과 무거움이 함께 공존하는 무대는 플라멩코 음악과 춤구경에 목말라하던 갈증을 충분히 적셔 주었습니다.

 

<보스케 아르도라>는 다른 춤 공연과 달리 스토리로 만들어졌어요. <백조의 호수> <라바야데르> 등과 같이 명확한 이야기가 있는 전막 발레 공연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야기를 3부로 나누어 플라멩코의 한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짜임새는 완성도가 높았어요.

 

이 작품은 로시오 몰리나와 함께 2년에 걸쳐 리옹과 마르세유 무용단, 샤이요와 올리비에, 마르세유 국립 극장 등 국제공동 기획으로 만들어졌어요. 솔로와 듀엣 그리고 트리오로 구성된 안무와 플라멩코 전통 기타 외 트롬본과 드럼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노래 등을 포함하여 탄탄한 구성을 보여주죠.

 

 

[로시오 몰리나, 출처:구글이미지 검색]

 

 

 

1부: 어울림

 

시작은 독특했습니다. 영상을 사용했어요. 뮤지컬이나 연극에서는 유행하고 있지만, 플라멩코 공연에서 영상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숲의 평온함을 여러 모습으로 보여주다가 로시오 몰리나가 탄 말발굽 소리가 마치 사파떼아또(탭댄스의 발구름같은 동작)를 연상시키며 나타나죠.

 

막이 올라가며 숲을 상징하는 무대가 보입니다. 실제 나무를 뽑아온 듯 했어요. 어두운 가운데 곧 무언가 일어날 듯한 긴장감을 연출합니다. 그 가운데 여우탈을 쓴 로시오 몰리나가 손과 팔로 여우의 기지개를 보여주고, 어깨를 축내린채 네 발로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동물의 몸짖으로 인사합니다.

 

마치 현대무용을 보는 듯 했어요. 전통적인 플라멩코의 틀에서 벗어난 듯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침묵 속에 이루어지는 몸짓과 사파떼아도와 같은 발구름이 아닌 신발의 끝으로 무대를 긁어내는 소리였어요. 마치 관객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아는 듯 쉽게 보여주지 않고 애 태우게 만듭니다.

 

익숙하게 떠오르는 춤을 처음부터 쉽게 보여주지 않았죠. 막이 오른지 약 10여분이 지난 후 그토록 보고 듣길 원했던 사파떼아또 리듬이 울립니다. 덩달아 제 심장도 두근두근. 평면적 구성의 단체 군무가 아닌 각자의 동선 속에서 따로 춤을 추다가 다시 함께 대형을 갖추어 추는 모습은 입체적으로 보였습니다.

 

간간히 예전에 제가 배웠던 동작이 나올 때는 반가웠어요. 1부는 이렇게 기존과 다르고 또한 익숙한 모습의 플라멩코를 통해 암컷의 여우 한 마리와 수컷 두 마리의 관계가 시작되는 걸 보여줍니다. 적당히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춤과 음악 그리고 적당한 침묵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에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어요.

 

 

[파리 샤이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보스케 아르도라>]

 

 

2부: 사랑

 

유니크한 연출의 연속이 이어집니다. '트롬본'이라는 금관악기에 맞춘 멜로디는 오묘한 느낌을 주더군요. 긴장을 느슨하게 풀게 하지만 곧 뭔가 나올 거 같은 야릇한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곧 드럼의 엇박자 리듬이 끼어들고 몰리나의 독무가 이어지다가 남성 댄서가 합류하면서 격정적인 분위기로 치닫죠.

 

삼각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이 연출되면서 남자 댄서 둘이 힘 겨루기를 합니다. 거기서 이긴 수컷과 사랑을 시작하려는 듯한 분위기는 시종일관 장난기 넘치는 연출이 돋보였어요. 유쾌한 모습이었습니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서로의 입으로 전달하는 모습을 춤으로 보여주죠.

 

그 뒷편에는 겨루기에서 진 수컷 하나가 애잔하게 혼자 오렌지로 놀고 있습니다. 문득 거기에 관심이 가는 암컷의 모습 곧 그와 나뭇가지처럼 오렌지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며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 2부가 시작된다는 의미로 로시오 몰리나의 의상이 바껴요.

 

동물을 상징하는 듯 했던 <타잔>의 제인이 입고 다녔을 법직한 원피스를 벗고, 팬티같은 반바지와 하얀색 셔츠를 입고 풀린 넥타이를 걸치고 하이힐을 신고 무대에 섭니다. 킬힐 정도의 하이힐로 플라멩코를 추는 몰리나의 모습은 섹시했어요. 하지만, 2부의 사랑에 빠지는 밀당의 주제는 느슨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작품 전체 스토리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질 수 없었겠지만, 플라멩코의 격정적인 춤을 보여주기보다 몸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성격이 강했죠. 그 와중 셋이 함께 춤추는 장면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구성되는 기타(토께), 노래(칸테), (바일레) 그리고 박수로 박자를 맞추어 주는 팔마스를 함께 보여주죠.

 

 

[로시오 몰리나, 출처: 구글이미지 검색]

 

 

3부: 작별

 

뒤늦게 찾은 사랑하는 수컷이 아닌 힘쎈 수컷과 원치 않게 자게 된 암컷(로시오 몰리나), 이를 알게 된 그 수컷과의 관계가 이어집니다. 화가 치솟은 수컷의 춤사위는 열받은 느낌과 실망, 좌절을 보여주죠. 여전히 비몽사몽한 암컷을 챙겨주는 모습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무엇일까 느껴집니다.

 

다시 한 번 로시오 몰리나의 옷이 바껴요. 플라멩코 여성 무용수(바일라오라) 전통적인 치마를 입고 나오는 데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원피스 같았어요. 1부와 2부에서 억눌렸던 춤과 음악을 보여주려는 듯한 하이라이트 였습니다. 암컷이 떠나려는 수컷을 잡으려는 내용으로 보였어요.

 

플라멩코 아니 집시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한을 보여주기에 어울리는 주제입니다. 먼저 팔마스(박수)로 기묘하게 흥분을 자아내는 와중에 남성 무용수(바일라오르) 힘찬 춤이 떠나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듯 보였어요. 애절한 로시오 몰리나의 춤이 이어지며 듀엣으로 이어집니다.

 

 

[힙합과의 콜라보레이션을 보여주는 로시오 몰리나]

 

 

에필로그

 

혼자 숲 속에 남은 몰리나의 춤은 그 동안 본인 걸어왔던 새로운 춤을 보여주었어요. 전통적인 손동작(브라세오)와 턴(부엘따)를 벗어난 무용과 동물적인 표현은 현대적 플라멩코를 대표합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사파떼아또(발구름)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듬이 주는 흥분은 그대로라 놀랐어요.

 

이전에 '사라 바라스' '스페인 국립 플라멩코 발레단'이 보여준 춤의 연속이라기 보다는 한 편의 스토리가 있는 작품 속에서의 플라멩코 공연을 본 듯 했습니다. 90여분 한 시도 쉬지 않고 무대 위에서 이야기와 감정을 춤에 담아 보여준 로시오 몰리나의 에너지가 대단해 보였어요.

 

또한, 그녀로 인해 '~ 플라멩코를 저렇게 출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이전에 한참 플라멩코를 배울 때 틀 속에 박혀 있는 듯 답답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어요. 공연을 보면서 대가가 된다면 틀 속에서도 무한한 자유스러움이 공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지상 Dream: http://wangmadam.net

 

[마음을 담은 리뷰 15-04] 안녕하세요. 왕지상입니다. 감명 깊은 공연을 보면 리뷰를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성격을 갖고 있어요. 공연 예술을 접하기 어려웠던 분들의 흥미를 이끌고, 보신 분들에게는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게 될 징검다리가 된다면 피곤은 뿌듯함이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마음을 담았습니다.

 

 

by 왕마담 2015.11.02 06:18